지방 소멸 위기는 단순한 인구 통계의 문제가 아니다. 한 마을이 사라진다는 것은 단지 사람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함께 살아온 이웃과의 관계가 끊기고, 고유의 생활문화와 공동체가 무너지는 과정을 의미한다. 실제로 많은 농촌과 산간마을에서는 초등학교가 폐교되고, 버스가 멈추며, 빈집이 마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현실에 놓여 있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 속에서 몇몇 마을은 스스로 변화의 동력을 찾아 나섰다. 외부의 자원을 기다리는 대신, 남아 있는 사람들이 함께 다시 마을을 만들기 위한 공동체 회복 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소멸 위기 직전에 놓였던 마을들이 어떻게 주민 주도로 공동체를 복원했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떤 변화가 생겨났는지를 구체적인 사례 중심으로 살펴본다. 이는 단순한 인구 회복이 아닌, 지방에서의 삶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근본적 구조에 대한 이야기다.
전북 완주군 대흥마을 – 마을이 스스로 사람을 부르다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대흥마을은 한때 전체 가구 수의 절반 이상이 고령자였고, 1인 가구 비율이 60%를 넘는 ‘고립된 마을’로 분류되었다. 폐교된 초등학교와 방치된 빈집, 마을회관조차 잘 활용되지 않던 이 마을은 공동체 재생이라는 실험을 주민 주도로 시작했다.
마을 주민들은 스스로 ‘빈집 살리기 위원회’를 만들고, 외부 청년이나 귀촌인을 위한 주거 안내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주목할 점은, 단순히 집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청년들이 마을 어르신을 도우며 공동체에 참여하도록 구조를 설계한 점이다.
이를 통해 형성된 ‘교환형 거주 프로그램’은, 청년이 농사일이나 집안 일을 돕는 대가로 저렴하게 거주 공간을 제공받는 방식이었다. 동시에 마을의 폐교는 공동육아 협동조합의 보금자리로 탈바꿈되었고, 지역 농산물을 활용한 가공식품 개발 모임도 생겨났다.
이러한 변화는 외부의 예산 지원이 아닌, 남은 주민들의 조직력과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회복 모델이었다. 결과적으로 3년 사이 대흥마을에는 30~40대 귀촌 인구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으며, 가장 큰 변화는 ‘다시 대화가 오가는 마을이 되었다’는 주민들의 체감 변화다.
경북 봉화군 명호면 – 돌봄을 중심으로 관계를 복원하다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은 전국에서 손꼽히는 고령화 마을 중 하나다. 인구 절반 이상이 70세 이상 고령자였고, 마을 내 병원이나 약국은 물론 슈퍼마켓조차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명호면은 2021년부터 ‘명호 돌봄 공동체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돌봄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 복원을 추진하게 된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복지 서비스가 아니라, 주민 상호 간에 도움이 오가는 상호 돌봄 네트워크 형성을 목표로 했다. 마을 주민 20여 명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마을 케어단’은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의 약 배달, 음식 조리, 외출 동행 등을 스스로 담당했다. 이와 동시에 귀촌 청년들과 연계해 ‘돌봄 바터 프로그램’도 운영했다.
예를 들어, 청년이 어르신의 심부름이나 차량 운전을 대신해주는 대가로, 빈집 거주 권리나 텃밭 사용권을 받는 식의 상호 호혜 구조였다. 명호면은 2년간 이러한 시스템을 통해 이탈 인구가 줄어들고, 정착률이 증가하는 성과를 얻었다. 가장 큰 변화는, 이전에는 사실상 단절되어 있던 마을 내 관계가 다시 복원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돌봄은 단순한 복지가 아니라, 공동체 회복의 언어가 된 것이다.
강원 정선군 도암리 – 청년과 함께 마을의 정체성을 다시 쓰다
정선군 도암리는 한때 광산촌으로 번성했으나, 채굴산업이 사라진 이후 급격한 쇠퇴를 맞은 마을이다. 마을 주민의 평균 연령은 68세였고, 폐가가 전체 주택의 4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인구 감소가 극심했다.
하지만 도암리는 외부 청년들과의 협업을 통해 마을 정체성을 다시 세우는 ‘로컬 리디자인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서울과 강릉에서 활동하던 디자이너, 영상 제작자, 농업 전문가 등이 일정 기간 마을에 체류하면서 마을 자원 재해석 작업에 참여한 것이다. 폐허가 된 광산 작업장은 문화예술 복합공간으로, 빈집은 공동 창작 스튜디오로 탈바꿈되었다. 또한 마을 어르신들은 청년들과 함께 ‘도암리 사진관’이라는 이름으로 옛 사진을 복원하고, 마을 기록 아카이브를 만들기 시작했다.
청년들은 단순한 정착자가 아닌, 마을의 스토리를 함께 창조하는 동료로 자리매김하였고, 주민들은 이 과정에서 자부심을 되찾았다. 도암리는 인구 수의 변화보다도, 정체성과 기억의 복원을 통해 공동체가 지속 가능해진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충남 서천군 문산면 – 자연을 매개로 관계를 회복한 생태 마을
충청남도 서천군 문산면은 2010년대 중반 이후 인구 급감과 함께 2개의 마을이 통폐합될 위기에 처했던 지역이다.
하지만 이 마을은 ‘자연과 함께하는 공동체 복원’을 목표로 한 생태 마을 만들기 운동을 통해 다시 살아나고 있다.
주민들은 기존에 방치돼 있던 하천과 논두렁을 정비해 자연 체험 학습장과 생태 탐방길로 만들었고, 이를 기반으로 외지 청소년 캠프와 주말 체험 마을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특히 주민과 귀촌 청년들이 함께 만든 ‘문산 생태부엌’은, 지역에서 난 식재료를 함께 조리하고 나눠 먹는 공동급식 프로그램으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자연 기반 활동은 마을 안에서 일상적으로 이웃과 만나고 협력하는 기회를 제공했고, 외지에서 유입된 청년들이 ‘이 마을은 혼자 살지 않게 해준다’는 말을 남길 정도로 관계 중심의 정착 기반을 마련했다. 문산면은 2024년 기준, 귀촌 청년 중 1년 이상 정착률이 80%를 넘고 있으며, 마을 내 세대 간 교류도 뚜렷하게 회복되고 있다.
지방 소멸 위기 지역이 해야 할 일
지방 소멸 위기에 놓인 마을들은 단순한 인구 유입이 아니라, 공동체 회복이라는 본질적인 문제에 집중하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어내고 있다. 완주 대흥마을의 관계 재생, 봉화 명호면의 돌봄 구조, 정선 도암리의 기억 복원, 서천 문산면의 생태 공동체 등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하나의 목적, 즉 '사람이 떠나지 않는 마을'을 구현하고 있다.
공동체란 공간이 아니라 관계이고, 정책이 아니라 사람이 만드는 것임을 이 사례들은 말해주고 있다. 지방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시, 사람 간의 연결을 복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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